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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글

우리는 "간때문이야"의 함정에 빠졌다



우리는 "간때문이야"의 함정에 빠졌다


by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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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가 대박을 쳤다. 모 제약회사의 광고가 시작된 게 몇 달은 된 것 같은데, 광고의 로고송인 "간때문이야"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는 것 같다. 왜 간때문이야는 우리의 뇌속에 이리도 깊이 파고들어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 걸까?


인지과학자들은 원형의 인지적 우선성에 대해 말한다. 한 범주 안에서 비원형적 요소보다 원형적 요소가, 그러니까 새라는 범주에서 펭귄보다는 참새나 까치가 먼저 생각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차두리의 노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먼저 광고의 구조를 보자. 한 직장인이 피로에 쩐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있고, "피로,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거기에 여러가지 대답 - 긴 출퇴근시간, 반복되는 야근, 상사의 잔소리, 신규 프로젝트 제안서 작성 - 이 제시된다. 그리고 갑자기 배경과 함께 이 이유들이 화면 왼쪽으로 급격히 치워지면서 문제의 노래, "간때문이야"가 치고 나온다. "간때문이야"는 순식간에 상황을 압도하고, 앞에 서 제시된 이유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잊혀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과관계'의 두 유형 사이에서 '직접적 인과관계'의 인지적 우선성이다. 앞에서 제시된 피로의 이유들은 유기적 인과관계의 보기들인데, 이 것들은 인과관계에 있어서 원형에서 먼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인과관계 개념은 유아기의 체험인 직접적 조작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난감을 건드리고, 그것의 움직임을 본다. 인지과학자들은 이것이 인과관계의 원형적 보기라고 말한다.


사실 세상의 많은 인과관계들은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언제나 이 사실을 지적한다.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습관의 배경에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TV로 그 아이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쟤가 덜 맞아서 그래". 여기에서도 직접적 인과관계는 유기적 인과관계를 보기 좋게 깔아뭉갠다.




재미있는 것은 조지 레이코프의 지적인데, 그는 미국의 정치를 인지언어학적으로 뜯어보다가 직접적 인과관계가 정치적 보수주의의 논리적 도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 인과관계의 틀에 담는 데에 능하다. "낙태 문제"가 대표적이다. 낙태문제라는 이름붙이기는 상황을 임신 여성의 부도덕을 문제로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배후의 문제는 복잡하다. 그녀가 섹스를 하게 된 이유, 콘돔을 쓰지 않았던 이유,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 등등의 많은 요소들이 사건과 관계되어 있지만, "낙태문제"라는 프레이밍은 그 모든 것들일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이미 그런 이름이 붙어버린 이후에는 다른 요소들을 아무리 지적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진보적 논객은 논쟁의 현장에서는 승리할 지 몰라도 일상의 현장에서는 그의 논리가 패배할 때가 많다.


이런 문제는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평도 포격 이후 민주당은 포격의 원인을 MB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탓이라고 규정하려 했으나, 대중적 반응은 MB의 입장인 "본때를 보여주자"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서 민주당의 프레이밍이 유기적 인과관계에 기초했다면, MB의 프레이밍은 조금 더 직접적인 인과관계, "때렸어? 너도 한대"에 기초한다. 인지적 우선성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사건의 사실 여부보다 강력하다.



배가 납치되었으니 해적을 소탕하고, 피로는 간때문이고, 소가 병에 걸렸으니 소를 묻어버린다. 그리고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했으니 북한을 밀어버린다. 언젠가부터 직접적 인과관계들이 이토록 우리 삶을 뒤덮어 버렸다. MB 정권 이후를 생각하려면 우리는 유기적 인과관계를 공적인 자리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잡게 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이 없다면, 설령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쟁취한다 해도 대중적 반대에 부딛힐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우리의 뇌는 다 성장한 이후에도 사용하기에 따라서 새로운 사고 회로를 개발할 수 있으며, 반복에 의해 이미 있는 회로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 MB가 다 해 주실거야"라고 하던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자, 이제 누가 이 나라를 "간때문이야"의 함정으로부터 끌어 낼 것인가! 라고 던질 테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