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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글

주님의 날은 밤에 도둑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대학생들의 자살 뉴스는 이 시대의 현실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돈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대출금과 학자금상환의 부담을 안고 있는 대학생들의 현실은 참담하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위한 공부보다 돈이 되는 공부가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스펙을 쌓기 위해 혈안이 된 학생들은 자신을 팔아 학원을 다닌다. 점점 일자리는 줄어들고 조기퇴직한 장년층이 이제는 아르바이트 시장에 뛰어들어 파트타임을 뛴다. 충돌은 피할 수 없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 되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인이 반복된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진실은 여기에 있다. 어디에선가 보았을, 바람부는 황량한 아파트에서 떨어진 헐벗은 육신이 바로 그 생존경쟁의 비참한 결말이다.

경쟁에 이기는 자만 살아남는다는 말은 약자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한쪽에는 더 많은 돈을, 한쪽에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경쟁논리는 우리 학교를 양극화한다. 학교는 효율성을 위해 대량실직을 감행하고, 얼마 남지 않은 일자리를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며, 그 경쟁에서도 기회를 잃은 사람들은 쪽방에서 목을 매달고, 소년소녀가 노숙자가 되어 화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올해 대졸자의 10명중 4명은 일자리가 없으며, 그나마 취직한 청년층의 임금수준은 월 평균 150만원 미만이 54.4%이며 기본급이 최저임금 기준 월 90만원도 안되는 이들이 30.3%이다. 실업률과 비정규직-정규직 임금 격차는 매년 커지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처럼 착취가 심화되고 사회가 경쟁논리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한 공동체로서 우리 사회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스펙을 위해 해고시켰다는 논리가 희망의 이야기가 되고, 당사자들에는 절망의 위협이 된다면, 어떻게 그 사회가 지속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장, 16절)”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수탈과 착취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며, 그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은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다. 젊은 부자와의 대화(10:17-37) 역시 현재 우리 학교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인권과 평화를 지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 신부에게 예수는 먼저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 신부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지켜왔노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한가지를 더 주문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못가진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은 신부는 예수의 주문을 따르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예수는 “신부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쉽다”고 말한다. 예수가 모든 법을 다 지켜왔다는 신부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법조항 하나를 더 추가하자는 말이 아니다. 인권과 평화를 위한 신부의 노력을 근본적으로 재고해보라는 요청이다. 가진 것을 못가진 자들과 나누라는 이야기는, 믿음의 실천을 관계 속에서 실현하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절망적인 경쟁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의 처지를 몰라라 하면서 인권과 평화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성공회대의 질서는 단지 인권과 평화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회대는 일정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그 가치관을 통해 자신의 질서를 유지한다. 지구화의 시대가 경쟁의 가치관을 심어주고, 양육비가 없으면 아이를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듯이, 성공회대의 가치와 질서도 수많은 희생자들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희생은 성공회대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성공회대는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무시당하고 차단된 목소리가 솟아날 때는, 일방적이라며 도덕적으로 비하하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나선다. 성공회대와 희생자들의 관계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삶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한마디로 근로장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총으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마서, 4장 4절]) 학생들이 나중에 근로기준법으로 질문을 던지고 도전해올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열중하는 천민주의가 자리하는 것도 바로 여기다.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가난한 이웃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스펙을 위한 계약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착각에 빠진 신부에게 예수는 가진 것을 못 가진 이들과 나누어 주라고 말한다. 이는 현실존재를 부인하고 그들과 의사불통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인권과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임금을 나눠서라도 그 깨어지고 닫힌 관계를 회복하라는 요청이다. 인권과 평화는 성공회대와 행정직원 사이에, 정교수와 시간강사에 관계의 진정한 회복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