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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글

우리는 모두 루저다



전에도 늘 그랬지만, 최근에도 서양 책을 읽거나 일본 사람들의 신학책을 읽으면 느끼는 건데, 그들에게는 신학 자체가 그들의 장(context)이에요. 가령 ‘바르트가 무슨 말을 했고, 불트만은 저렇게,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다. 틸리히(P. Tillich)는 뭐라고 그랬다.’ … 아라이 사사쿠 교수 … 그에게 말해줬어요. “너와 나의 차이는 그거구나. 나는 한국 민중의 현실을 가지고 신학 하는데 너는 그 ‘장’이 없구나.” … 서양 사람들은 아직도 플라톤(Platon)이 뭐라고 했나, 칸트(I. Kant)는 뭐라 했나, 헤겔(G. F. W. Hegel)은 무슨 말 했나, 이런 맥락 속에 내 신학, 내 사상의 위치를 자꾸만 찾거든요. 밤낮 그런 식으로 관념의 세계 안에서만 뱅뱅 돌아요. 결코 현실로 나가지를 않아요.

-안병무, 『민중신학을 말한다』(도서출판 한길사, 1993), 34-36.

 

민주주의는 누굴 위하여 울리나

현재 중동에서의 민주주의는 혁명의 상징이면서 불온함이고 영미유럽열강들의 자본을 위협하는 불안함이면서 동시에 기업의 안정과 자본주의적 문화구성을 보장하는 매개체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중동의 혁명과정을 바라볼 때 이와 같은 다양한 맥락과 조건이 얽혀있는 복잡계를 고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논평적 입장에서 어느 한 입장에서 선언을 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인민들의 치열한 희생과 투쟁을 통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야기할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민주주의의 배경으로 석유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동자본의 재구성과 서구열강의 욕망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인민권력의 상징이면서 또한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이데아가 존재하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지 다른 어느 것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시각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이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너무나 많은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에 단지 의미가 없는 기표에 불과하거나.

 

자본주의를 내포한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외연을 쓴 자본주의?

민주주의적 인간은 순수한 현재만을 산다. 월요일엔 자전거 위에서 페달을 밟으며 … 다시 몸을 만들고, … 화요일에는 담배 피우며 진수성찬을 만들고, … 저녁엔 영화관에 가서 중세의 전투장면이 나오는 허접한 블록버스터를 본다. … 잠자리에 들 땐 예속된 인민들의 무장해방에 가담하는 꿈을 꾼다. … 질서도 없고 생각도 없다. … 그것은 즐겁고, 행복하며, 무엇보다 의미 없지만 그만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미에 대한 대가로 자유를 지불하라, 그건 별로 비싼 게 아니다.

- 알랭 바디우, 민주주의라는 상징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난장) 37-38

 

알랭 바디우는 오늘날 민주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위와 같다고 말한다. 사실상 자본주의라는 토양에서의 민주주의적 삶을 방종과 자유방임적 삶과 등치시키며 이와 같은 민주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정치적인 의미를 조직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귀족이 되라고 말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살았던 플라톤이 했던 비판의 맥락을 따르는 것인데, 플라톤은 항해사의 예를 들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풍랑을 해쳐갈 항해사를 뽑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배를 잘 몰지는 못할 것이란 것을 지적하며, 국가도 이와 같아서 항해술을 가진 자와 같은 사람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바디우의 방종과 자유방임의 비판 역시 플라톤이 자유와 평등의 요구에 따른 권위와 질서의 붕괴로 제시한 비판을 따른다. 다만 차이는 바디우의 비판이 단지 민주주의 비판만이 아닌 자본주의 비판과 엮여있다는 것인데 플라톤의 민주주의 비판점 지점부분이 자본주의와 걸맞기 때문에 현재 민주주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인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외피를 썼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중요한 점은 현재 민주주의가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이고 이를 지양하며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귀족이라기보다는 이를 떠받치는 노예이다.

 

Whose Freedom?

바디우가 언급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가 민주주의자라서기보다는 그가 이 시대의 귀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민주주의자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이와 같은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월요일에 일하지 않고 자전거를 밟을 수 있으며 … 담배와 진수성찬을 매주 화요일에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며 … 허접한 블록버스터를 영화관에서 관람할 만큼 여가생활이 익숙하며 … 인민의 예속과 해방에 대하여 꿈을 꿀 정도로 지식이 뒷받침되는 젊고 건강한 백인 남성” 대다수 민주주의자의 삶은 매일같이 노동을 해야 하며 피곤에 찌들어 자전거를 밟을 시간과 힘은 커녕 자전거조차 없으며 음식값을 아껴 담배와 깡소주로 하루를 달래며 꿈조차 꿀 여유도 없이 잠에 빠졌다 깨어나 다시금 일터로 나간다.

 

이렇게 삶과 괴리된 민주주의의 상징을 박탈해야 하는가? 저러한 민주주의의 상징은 정말로 방종과 자유방임의 상징이며 쾌락적이고 이기적인 무의미한 욕망일 뿐인가? 오히려 저 상징이야말로 우리가 들어야만 하는 깃발이며 상징에서 현실로 끌어올려야하는 것은 아닐까? 루저와 위너, 빵과 고기, 배추와 양배추, 고폭탄과 보온병의 간극과 괴리에서 우리가 주장해나가야 하는 것은 바디우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노예 되기” 세상이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 너와 나, 우리는 모두 루저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집과 배추를 달라!

 

그래서 위와 같이 말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조직 또는 혁명정당의 역할, 특히 전위를 둘러싼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이다. 더욱이 국가와 의회민주주의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조직-정당과 인민대중의 관계에서 대의제적인 문제, 대표자의 성격을 “대의적 대표”와 “위임적 대표” 중 어느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민주적인가 또는 민주적이어야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민주적인 것인가? 라는 질문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며 논쟁점이다.

 

성공회대 08년도 동맹휴업 사례

08년도 촛불시국 당시 다함께측에서 집권했던 성공회대 총학생회는 중앙운영위원회 차원에서 동맹휴업을 통과시켰으며 이 사실은 뒤늦게 학생대중에게 알려져 많은 반발을 샀으며 여럿의 성명서들이 나돌았다. 주요 얼게는 이러하다. 총학생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동맹휴업에 대한 찬반 총투표와 의견수렴에 대한 집착은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적 이해다. 압도적 여론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총학생회, 다함께)

2."대학생들의 동맹휴업에 대한 사회적 필요, 촛불행진에 대한 성공회대 학우들의 지지와 참여가 확대되기를 바라는 학생사회의 요구", 그리고 "압도적 여론"이 존재한다. (총학생회, 다함께)

3. 현 시국이 급박하여 동맹휴업을 강행 할 수 밖에 없었다. (총학생회, 다함께)

4 동맹휴업에 대해서는 교칙이나 총학생회 회칙에 명시된 것이 없으므로 중운위에서 가결하는 것이 가능하다.(총학생회)

5.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이 정당하므로 동맹휴업의 절차를 문제 삼으면 안된다. (다함께)

 

여기에 최일붕이 “그럼에도 일부 대학교에서는자발성주의자들과 우파 대학생들이 총투표를 거치지 않은 그 어떤 결정도 무효라는 초(지나친) 민주주의 입장을 표방하면서,총학생회나 중앙운영위원회의 동맹휴업 호소를 저지하려고 협공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기름을 끼얹었다.

 

이를 학생사회에서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비판을 하였다.

1. 다함께가 주장하는 ‘압도적 여론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바로 총투표를 비롯한 민주적 의견수렴이다.

2. 그러한 압도적 여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면 총투표를 실시하여 동맹휴업에 대한 학우들의 여론이 '실제로'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이미 많은 학교가 총투표 등의 의사수렴과정을 거치며 동맹휴업의 행동을 맞추어왔다. 시국이 급박하기에 동맹휴업에 대한 강행처리가 불가피했다는 것은 현 시국에 대한 잘못된 이해, 혹은 의도적 과잉해석에 불과하다.

4. 회칙에 명시되지 않은 행동을 결의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총투표과 같은 학생 전체의 의견수렴이 필요한 것이다.

5. 절차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네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식의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

 

성공회대 09년도 투표조작 사례

09년도 성공회대 총학생회는 한 대련측이 집권하였다. 곧 한 대련 가입문제를 총투표에 붙였는데 투표결과는 부결이었다. 당시 개표를 참관하던 부총학생회장은 선거관리위원들에게 “하지만은 우리의 학교가 한대련에 가입하지 못하면 우리 학교는 이명박 정부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 지금 대학생 등록금도 너무나도 비싸고, 학생들 노동자 탄압하고 하는 이명박 정부. ‘적’을 향해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뭉쳐야만 하는 것이고 …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회대가 한대련에 가입하지 않으면 정말 대학생들의 미래와 희망이 없는 거지.”라며 개표조작을 요구하였고 결국 “저희 성공회대는 학우들의 지지를 받아서, 민주적인 절차로 당당하게 한대련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총학생회가 주장하게 된다. 부정사실이 알려진 것은 10년도 총학생회 선거운동과정에서였으며 한 대련측 후보가 한 대련가입계승을 주장하고 앞서의 부총학생회장이 직위를 사퇴하고 한 대련측 선본활동을 하는 와중이었다. 조작 사실이 알려진 이후 선거는 보이콧되어 비상대책위가 섰으며 09년도 총학생회는 투표조작 외에도 300만원이 사라지는 회계사고를 내었지만 09년도 총학생회 집행부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부총학생회장과 개표조작을 한 당시 선거관리위원회는 교내봉사 120시간 처벌을 받았고 선거관리위원들은 이를 시행하였으나 부총학생회장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고서 애인과 스키장에 놀러가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다가 군대로 입대해버리고 만다. 한 대련측에선 당시 부산대측에서도 부정시비에 휘말렸으며 이 사건에 대하여 미가입처리했다는 내부적 언급만 있을 뿐, 공식적 입장발표나 사과가 일절 없었으며, 비상대책위원회 측이 09년도에 한 대련에 납부된 분납금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어떠한 반응도 없는 상태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었던 점은 11년도 총학생회 선거때 09년도 총학생회 회장이 출마하겠다고 나섰으며 이에 대하여 대다수 학우대중이 반발하였으나 회칙의 규정상 어떠한 연임의 제한 규정도 없다는 이유로 선거가 진행되었고 결국은 떨어졌다. 하지만 09년도 총학생회장을 둘러싼 논쟁 와중에 다함께가 “총학 선거 보이콧 운동은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종파주의 세력의 정치공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조직적 판단”을 내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신적폭력과 어디까진가의 틀과 민주주의와 정치

위와 같은 사례를 신적폭력으로 긍정할 수 있을까? 거칠게 말하자면 광주의 시민군의 무장투쟁과 전두환의 공수부대의 학살은 동일한 신적 폭력은 아닌가? 아니라면 “네가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를 벗어날 수는 있는가? 아니면 위의 사례들처럼 대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가? 위의 학생사례에도 계급적 편향과 비대칭성은 존재하는가? 신적 폭력은 계급투쟁에서 계급적대에게만 행해지는가? 스탈린의 숙청 역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안정시키기 위한 신적 폭력인가? 혁명과 운동과정에서 신적폭력은 수단적일 수 있는가? 칼에는 눈이 존재하는가? 신적폭력으로 적대를 소멸시킨 정체에 정치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외부의 적대를 찾을 것인가? 지구라는 공간의 제약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주로 넘어가는가? 인류는 콤바인과 네크로모프를 찾아야하는가? 바울과 레닌이 예수와 맑스의 재림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고든과 아이작은 누구의 재림인가? 아니면 예비할 것인가?